
9.24 기후정의행진 청년기후긴급행동 희표 발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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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에 사는 저의 한 친척은 서천에 사는 아이들 중 삼분의 일이 비염이 있다는 얘길 했습니다. 본인의 자녀도 비염 때문에 이비인후과에 자주 간다고 했습니다. 서천을 비롯한 충청권 해안 지역에 석탄발전소가 많이 지어져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제가 속한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활동하는 청연과 은빈은 베트남의 하띤성에 지어질 석탄화력발전소 붕앙 2호기 건설을 저지하고자 직접행동을 벌이다가 벌금형을 선고받고 기업으로부터 고소를 당했습니다. 두 활동가가 붕앙 2호기가 세워지는 것을 반대했던 것은, 2호기에 앞서 지어진 붕앙 1호기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삶의 기반과 지역 생태계가 무너진 선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띤성에 발전소가 지어지면서, 발전소에서 뿜어내는 분진이 사람들이 사는 집을 뒤덮었고, 주민들은 우물물과 빗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 수단인 고기잡이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곳엔 발전소의 영향으로 인해 질병을 앓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산호초와 물살이(물고기) 등 바다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비인간 생명들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습니다.
충청도든 강원도든 베트남이든 인도네시아든 석탄화력발전소를 새로 짓고 계속해서 운영하겠다는 논리를 뜯어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깃들어 있는 것들이 보입니다. 무한한 경제 성장에 대한 환상과 강박, 사회정의와 생명보다는 자본의 이익과 국익을 앞세우는 경영 논리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논거들을 통해 특정 존재들 혹은 특정 지역에 기후·생태적 부담을 전가하는 행위는 손쉽게 정당화되곤 합니다. 사람들은 추하고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 위험한 것을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자기 신체 바깥으로, 자기의 경험치 바깥으로, 자기가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의 범위 바깥으로 자꾸만 밀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누군가가 그렇게 밀려난 것들을 떠맡습니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에너지 발전을 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가 사그라들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종종 머무는 전남 곡성의 한 마을에선** 최근 신재생에너지인 풍력발전 시설이 들어온다는 소문으로 온 동네가 술렁입니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본인은 귀가 먹었으니 그나마 저 소음과 함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농담 섞인 이야기를 합니다. 다 늙은 우리들이야 그 웅웅대는 소리를 견디지, 젊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저게 들어갈 수 있겠나, 하시면서요. 그리고 이런 말씀도 덧붙입니다. 그런데 환경이고 풍력발전이고 뭣이고 간에 당장 동네 축사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못 살겠다. 결국 오염수도, 분진도, 소음도, 악취도, 송전탑도, 방사성 폐기물도, 땅값이 싸고, 생명의 값이 싸고, 고통과 죽음을 가장 손쉽게 삭제할 수 있는 곳으로 흘러 들어가나 봅니다.
이러한 부정의와 불평등은 지역과 장소라는 구분 하나만으로 해명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무한성장과 팽창에 대한 강박에 갇혀 있고, 착취적인 경제 시스템이 계속되는 한 기후·생태위기의 부담과 위험은 여성, 장애인, 저소득층, 난민, 야외노동자, 농민, 남반구 시민 등 여타의 약자/소수자들에게 계속해서 전가되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차별적 관계 또한 계속해서 강화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기업과 정부는 기후위기를 명분으로 지배 연합을 재구축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정부와 자본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는 것은, 우리 자신 또한 이 폭력적인 사회 시스템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가담하거나 내몰리고, 목격하거나 외면하면서, 여러 층위와 입장으로 착잡하게 뒤얽힌 당사자로서 끊임없이 이 문제에 연루됩니다. 우리 또한 결코 이러한 타자화와 외부화의 문제로부터 무관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이 자기의 안위를 위협하지 않을 때, 그것이 자기의 경험 세계 밖에 있을 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동요 없이 잠잠한지, 여러 번 실감합니다. 각자에게 떠맡겨진 혹은 각자가 외면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듣고 말하고, 그렇게 다시 연결감을 회복하며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 세계를 확장해 가고 싶습니다.
자본이 아니라 생명의 편에,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편에 섭시다.
타자화와 외부화의 방식이 아니라 연대와 분담의 방식을 택합시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서 지키고 얻어낼 것입니다.
삶의 아름다움을. 사회의 정의로움을.
생명들의 영속하는 그물망을.
이전과 전혀 다를 새 세상을 함께 쟁취합시다.
9.24 기후정의행진 청년기후긴급행동 희표 발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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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에 사는 저의 한 친척은 서천에 사는 아이들 중 삼분의 일이 비염이 있다는 얘길 했습니다. 본인의 자녀도 비염 때문에 이비인후과에 자주 간다고 했습니다. 서천을 비롯한 충청권 해안 지역에 석탄발전소가 많이 지어져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제가 속한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활동하는 청연과 은빈은 베트남의 하띤성에 지어질 석탄화력발전소 붕앙 2호기 건설을 저지하고자 직접행동을 벌이다가 벌금형을 선고받고 기업으로부터 고소를 당했습니다. 두 활동가가 붕앙 2호기가 세워지는 것을 반대했던 것은, 2호기에 앞서 지어진 붕앙 1호기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삶의 기반과 지역 생태계가 무너진 선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띤성에 발전소가 지어지면서, 발전소에서 뿜어내는 분진이 사람들이 사는 집을 뒤덮었고, 주민들은 우물물과 빗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 수단인 고기잡이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곳엔 발전소의 영향으로 인해 질병을 앓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산호초와 물살이(물고기) 등 바다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비인간 생명들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습니다.
충청도든 강원도든 베트남이든 인도네시아든 석탄화력발전소를 새로 짓고 계속해서 운영하겠다는 논리를 뜯어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깃들어 있는 것들이 보입니다. 무한한 경제 성장에 대한 환상과 강박, 사회정의와 생명보다는 자본의 이익과 국익을 앞세우는 경영 논리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논거들을 통해 특정 존재들 혹은 특정 지역에 기후·생태적 부담을 전가하는 행위는 손쉽게 정당화되곤 합니다. 사람들은 추하고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 위험한 것을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자기 신체 바깥으로, 자기의 경험치 바깥으로, 자기가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의 범위 바깥으로 자꾸만 밀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누군가가 그렇게 밀려난 것들을 떠맡습니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에너지 발전을 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가 사그라들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종종 머무는 전남 곡성의 한 마을에선** 최근 신재생에너지인 풍력발전 시설이 들어온다는 소문으로 온 동네가 술렁입니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본인은 귀가 먹었으니 그나마 저 소음과 함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농담 섞인 이야기를 합니다. 다 늙은 우리들이야 그 웅웅대는 소리를 견디지, 젊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저게 들어갈 수 있겠나, 하시면서요. 그리고 이런 말씀도 덧붙입니다. 그런데 환경이고 풍력발전이고 뭣이고 간에 당장 동네 축사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못 살겠다. 결국 오염수도, 분진도, 소음도, 악취도, 송전탑도, 방사성 폐기물도, 땅값이 싸고, 생명의 값이 싸고, 고통과 죽음을 가장 손쉽게 삭제할 수 있는 곳으로 흘러 들어가나 봅니다.
이러한 부정의와 불평등은 지역과 장소라는 구분 하나만으로 해명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무한성장과 팽창에 대한 강박에 갇혀 있고, 착취적인 경제 시스템이 계속되는 한 기후·생태위기의 부담과 위험은 여성, 장애인, 저소득층, 난민, 야외노동자, 농민, 남반구 시민 등 여타의 약자/소수자들에게 계속해서 전가되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차별적 관계 또한 계속해서 강화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기업과 정부는 기후위기를 명분으로 지배 연합을 재구축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정부와 자본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는 것은, 우리 자신 또한 이 폭력적인 사회 시스템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가담하거나 내몰리고, 목격하거나 외면하면서, 여러 층위와 입장으로 착잡하게 뒤얽힌 당사자로서 끊임없이 이 문제에 연루됩니다. 우리 또한 결코 이러한 타자화와 외부화의 문제로부터 무관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이 자기의 안위를 위협하지 않을 때, 그것이 자기의 경험 세계 밖에 있을 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동요 없이 잠잠한지, 여러 번 실감합니다. 각자에게 떠맡겨진 혹은 각자가 외면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듣고 말하고, 그렇게 다시 연결감을 회복하며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 세계를 확장해 가고 싶습니다.
자본이 아니라 생명의 편에,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편에 섭시다.
타자화와 외부화의 방식이 아니라 연대와 분담의 방식을 택합시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서 지키고 얻어낼 것입니다.
삶의 아름다움을. 사회의 정의로움을.
생명들의 영속하는 그물망을.
이전과 전혀 다를 새 세상을 함께 쟁취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