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칠 공간과 솔선하며 부추겨주는 동지 덕에
소담하고도 담차게 발화해봅니다
1. 나의 연대 : 듣고 중재하고 살리기
한동안 스스로 역마살 낀 인생이라고 칭했다. 자잘한 신변의 변화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빠른 년생으로 입학해 학업 부진으로 1년을 유급한 덕에 초등학생으로 총 7년의 세월을 보냈고, 그 사이 별의별 이유로 총 5개의 학교 혹은 홈스쿨링을 전전했다. 잦은 변화로 얻은 득이라면 시시때때로 주변풍경과 인물들이 바뀌었고 그들에게 호기심이 많다. 다만 조용하게 한발 물러서 관찰하고 이해해볼 따름이다. 폐쇄적인 개방성이랄까. 객의 입장으로 만나는 타인들의 이야기는 즐겁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귀 기울이는 방식은 익숙해졌고, 일종의 관음증적인 시각은 검토할 새 없이 내면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한 성정은 신변의 변화를 맞으며 타인을 듣고 관조하는 습관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막 주요한 방어기제를 하나 얻을 참이었다. 부모님이 가까운 친척에게 상처를 받은 일이 있었다. 부모님은 스스로를 지키거나 변호하는 대신, 당신을 힘들게 했던 그 친척을 이해하려 애썼고 그 사람이 비난받지 않도록 본인들이 잠적하는 방식을 택했다. 아무도 서로에게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족 전체가 3년간 교회를 떠돌아다녔고, 설명되지 않는 어둡고 칙칙한 여파도 늘 함께였다. 어느 날은 부모님의 행동을 답습해 감정을 억눌렀고, 또 어느 날은 그들이 표현하지 않는 분노와 상처를 대신 발화하려 했다. 익숙했던 듣기의 방식은 나를 지키는 주요한 무기로 변모하며 오지랖이라는 특징을 추가로 얻었다. 스스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양쪽을 이해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누구도 부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중간자의 위치는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방식이자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양측의 경계를 허무는 방향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상시 경계(警戒) 태세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境界) 위에 자리했다.
타인의 일에 소심하고도 오만하게 개입하는 방식이 고착된 계기가 있다. 2019년도는 개인적으로 상징적인 해였다.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방법을 몰랐던 당시였다. 와중에 제일의 우선순위로 등극한 건 아픔 혹은 죽음에 관련한 이슈였다. 그 해 유독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진짜 죽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낯설고 긴급한 상황일수록 익숙한 행동을 하게 된다. 또다시 누구도 부탁하지 않은 자리를 만들고 귀를 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마음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시도의 연속이었다.
은은한 죽음 사이에서 생명을 외치고 싶었던 듯싶다. 살리고 싶었고, 함께 살고 싶었다. 다른 모든 이들을 살리면서 저 하나는 못/안 살리는 활동가들이 가여웠다. 아마 부모님의 모습을 보는 듯한 위태로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하여 자신을 소외시킨 스스로를 마주하는 경험이었다. 자신을 연민하고 이를 해소하려 대신 타인의 아픈 구석을 바라보는 거라고 할까.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본다. 아직 충분한 빛을 받지 못한 어둠을 본다. 지나간 혹은 지금의 아픔에 같이 머물고 싶다. 한때, 타인의 관계와 상처에 괜시리 끼어들려는 내 행동 방식을 자각하지 못했다. 자각하지 못한 말/행동은 쉬이 조절되지 못한다. 조용히 또는 왁자지껄하게 억압하거나 표출한다. 상담의 도움을 받아 내 렌즈를 인식한 후로는 한 사람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려고 노력한다. 한 사람에게 어두운 면만 있지 않고 밝은 면도 있다는 걸 안다. 홀로 책임지려기보다 함께 할때에야 가능한 일들을 본다. 내가 한 사람을 온전히 책임질 수 없다는 것도, 책임지려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어둠을 캐내려는 습관은 잦아들었지만,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 생명을 이끌어내고픈 욕구는 내치지 않기로 했다.
듣고 중재하고 나와 너를 살리고픈 욕구, 어찌 보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주요한 동력 중 하나다. ‘사이’의 공간은 중요하다. 다만 사이에만 있는 건 위태롭다. 그래서 거리를 두는 방식에서부터 거리를 두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객이 아닌 지속가능한 관계를 향해 도전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신앙과 관계들이 계기가 되어 동기로 불어났고, 그렇게 또 다른 삶의 주체들과 연대해왔고 오늘에서는 ‘김공룡들’과 연대하고 있다.
2. 우리의 연대 : 시작점
반복하자면, 낯설고 긴급한 상황일수록 익숙한 행동을 하게 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긴급한 문제에 어떤 양식의 긴급행동을 취하는가를 아는 게 먼저인 듯 싶다. 내게 익숙한 언어로 풀어보자면,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는 그 때, 그 자리에서의 최선을 다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양측을 중재하는 방식이 10대의 내게 최선이었듯, 삼척에서의 직접행동도, 이주노동자 불법숙소를 고발해달라는 연대의 부름에 응답한 것도 당시의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수고한, 수고하고 있는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는 맘이다.
맥락을 등에 업은 행동에 문제가 생기는 지점은, 몇 가지 행동만을 고집할 때와 스스로의 행동과 행동의 맥락을 자각하지 못할 때이다. 익숙한 행동을 반복하니 습관이 되어 인지하지 못하고, 정확히 설명해내지 못하니 상황과 무관하게 익숙한 몇 행동만을 반복할 뿐이다, 는 악순환. 특히 위험하거나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누구든 익숙한 행동을 취한다. 느긋하게 상황을 검토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걸 알고 있어 다행인, 인간의 본능이고 생존 기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부터 긴급행동이니만큼 불가피한 상황은 많고, 많을 거다. 긴급행동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면 시기가 안정되었을 때(마다) 검토하는 게 최선이라는 소견을 이어본다. 그래서 해결의 시작점도 행동과 그와 연계된 맥락을 자각하는 것. 이를 자각하고 유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부단히 굴러가는 바퀴를 멈출 수 있는, 불편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돌멩이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조직적으로 마주하게 되었으니 여기가 최적의 시발점이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조명된 문제를 같이 반기고 싶다. 지나간 복잡한 맥락 속에서 누군가의 고민을 함께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지난 노고에 등 두드려주고, 하마터면 가시가 박힌 채 굴러갈 뻔한 바퀴를 잠시 멈춰 세우고 정비할 수 있어 안심이다. 기스는 났지만 누구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지금이 검진 시기, 그것도 적기인가보다. 새로운 기준과 우리의 운동을 정하고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길 바란다.
소리칠 공간과 솔선하며 부추겨주는 동지 덕에
소담하고도 담차게 발화해봅니다
1. 나의 연대 : 듣고 중재하고 살리기
한동안 스스로 역마살 낀 인생이라고 칭했다. 자잘한 신변의 변화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빠른 년생으로 입학해 학업 부진으로 1년을 유급한 덕에 초등학생으로 총 7년의 세월을 보냈고, 그 사이 별의별 이유로 총 5개의 학교 혹은 홈스쿨링을 전전했다. 잦은 변화로 얻은 득이라면 시시때때로 주변풍경과 인물들이 바뀌었고 그들에게 호기심이 많다. 다만 조용하게 한발 물러서 관찰하고 이해해볼 따름이다. 폐쇄적인 개방성이랄까. 객의 입장으로 만나는 타인들의 이야기는 즐겁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귀 기울이는 방식은 익숙해졌고, 일종의 관음증적인 시각은 검토할 새 없이 내면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한 성정은 신변의 변화를 맞으며 타인을 듣고 관조하는 습관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막 주요한 방어기제를 하나 얻을 참이었다. 부모님이 가까운 친척에게 상처를 받은 일이 있었다. 부모님은 스스로를 지키거나 변호하는 대신, 당신을 힘들게 했던 그 친척을 이해하려 애썼고 그 사람이 비난받지 않도록 본인들이 잠적하는 방식을 택했다. 아무도 서로에게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족 전체가 3년간 교회를 떠돌아다녔고, 설명되지 않는 어둡고 칙칙한 여파도 늘 함께였다. 어느 날은 부모님의 행동을 답습해 감정을 억눌렀고, 또 어느 날은 그들이 표현하지 않는 분노와 상처를 대신 발화하려 했다. 익숙했던 듣기의 방식은 나를 지키는 주요한 무기로 변모하며 오지랖이라는 특징을 추가로 얻었다. 스스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양쪽을 이해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누구도 부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중간자의 위치는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방식이자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양측의 경계를 허무는 방향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상시 경계(警戒) 태세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境界) 위에 자리했다.
타인의 일에 소심하고도 오만하게 개입하는 방식이 고착된 계기가 있다. 2019년도는 개인적으로 상징적인 해였다.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방법을 몰랐던 당시였다. 와중에 제일의 우선순위로 등극한 건 아픔 혹은 죽음에 관련한 이슈였다. 그 해 유독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진짜 죽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낯설고 긴급한 상황일수록 익숙한 행동을 하게 된다. 또다시 누구도 부탁하지 않은 자리를 만들고 귀를 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마음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시도의 연속이었다.
은은한 죽음 사이에서 생명을 외치고 싶었던 듯싶다. 살리고 싶었고, 함께 살고 싶었다. 다른 모든 이들을 살리면서 저 하나는 못/안 살리는 활동가들이 가여웠다. 아마 부모님의 모습을 보는 듯한 위태로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하여 자신을 소외시킨 스스로를 마주하는 경험이었다. 자신을 연민하고 이를 해소하려 대신 타인의 아픈 구석을 바라보는 거라고 할까.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본다. 아직 충분한 빛을 받지 못한 어둠을 본다. 지나간 혹은 지금의 아픔에 같이 머물고 싶다. 한때, 타인의 관계와 상처에 괜시리 끼어들려는 내 행동 방식을 자각하지 못했다. 자각하지 못한 말/행동은 쉬이 조절되지 못한다. 조용히 또는 왁자지껄하게 억압하거나 표출한다. 상담의 도움을 받아 내 렌즈를 인식한 후로는 한 사람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려고 노력한다. 한 사람에게 어두운 면만 있지 않고 밝은 면도 있다는 걸 안다. 홀로 책임지려기보다 함께 할때에야 가능한 일들을 본다. 내가 한 사람을 온전히 책임질 수 없다는 것도, 책임지려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어둠을 캐내려는 습관은 잦아들었지만,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 생명을 이끌어내고픈 욕구는 내치지 않기로 했다.
듣고 중재하고 나와 너를 살리고픈 욕구, 어찌 보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주요한 동력 중 하나다. ‘사이’의 공간은 중요하다. 다만 사이에만 있는 건 위태롭다. 그래서 거리를 두는 방식에서부터 거리를 두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객이 아닌 지속가능한 관계를 향해 도전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신앙과 관계들이 계기가 되어 동기로 불어났고, 그렇게 또 다른 삶의 주체들과 연대해왔고 오늘에서는 ‘김공룡들’과 연대하고 있다.
2. 우리의 연대 : 시작점
반복하자면, 낯설고 긴급한 상황일수록 익숙한 행동을 하게 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긴급한 문제에 어떤 양식의 긴급행동을 취하는가를 아는 게 먼저인 듯 싶다. 내게 익숙한 언어로 풀어보자면,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는 그 때, 그 자리에서의 최선을 다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양측을 중재하는 방식이 10대의 내게 최선이었듯, 삼척에서의 직접행동도, 이주노동자 불법숙소를 고발해달라는 연대의 부름에 응답한 것도 당시의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수고한, 수고하고 있는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는 맘이다.
맥락을 등에 업은 행동에 문제가 생기는 지점은, 몇 가지 행동만을 고집할 때와 스스로의 행동과 행동의 맥락을 자각하지 못할 때이다. 익숙한 행동을 반복하니 습관이 되어 인지하지 못하고, 정확히 설명해내지 못하니 상황과 무관하게 익숙한 몇 행동만을 반복할 뿐이다, 는 악순환. 특히 위험하거나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누구든 익숙한 행동을 취한다. 느긋하게 상황을 검토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걸 알고 있어 다행인, 인간의 본능이고 생존 기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부터 긴급행동이니만큼 불가피한 상황은 많고, 많을 거다. 긴급행동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면 시기가 안정되었을 때(마다) 검토하는 게 최선이라는 소견을 이어본다. 그래서 해결의 시작점도 행동과 그와 연계된 맥락을 자각하는 것. 이를 자각하고 유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부단히 굴러가는 바퀴를 멈출 수 있는, 불편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돌멩이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조직적으로 마주하게 되었으니 여기가 최적의 시발점이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조명된 문제를 같이 반기고 싶다. 지나간 복잡한 맥락 속에서 누군가의 고민을 함께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지난 노고에 등 두드려주고, 하마터면 가시가 박힌 채 굴러갈 뻔한 바퀴를 잠시 멈춰 세우고 정비할 수 있어 안심이다. 기스는 났지만 누구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지금이 검진 시기, 그것도 적기인가보다. 새로운 기준과 우리의 운동을 정하고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