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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기고[231002] 9월에 만난 해방의 꿈과 정치적 희망, 그리고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길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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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쉽다”는 말 처럼 세계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지만 그에 필적하는 저항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냉소만이 떠다닌다. 위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더 나은 세계가 떨어지지 않는다. 완고한 대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공고한 체제를 넘어서는 저항과 이행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우발적 계기는 연쇄적인 분노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체제를 탈환하고 변혁하는 움직임이 되기 위해서는 지독하게 고요하고 고통스러운 밤의 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 밤의 시간을 살아낸 자들에게만 새벽은 찾아오고 우리의 하루를 탈환해낼 수 있을 것이다. 


  청년기후긴급행동은 밤의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가? 지난 반 년의 경험은 나에게 있어서 강렬했다. 내 삶은 남성성에 기반한 가해 경험과 그것으로 부터 도피하고자 선택한 운동마저도 남성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성폭력 사건 이후 반폭력적인 공동체 재구축의 과정은 나에게 있어서 폭력이 사라진 방식으로 관계 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한 뼘의 공간”이지만 가부장적 폭력과 억압이 사라진 질서가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은 내 삶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대안으로 다가왔다. 경제적 불안과 정치적 무기력, 젠더 위계적 폭력, 획일적인 경쟁과 그에 따른 고립, 그리고 지구라는 삶의 터전이 붕괴되는 현실 속에서 냉소로 변해버린 빼앗긴 아픔이 찾아갈 집은 어디인가? 아무도 듣지 않는 목소리에 대한 청년기후긴급행동의 정치적 듣기와 반폭력적인 관계로의 환대에서 부유하는 이들이 발딛고 살아갈 수 있는 땅이 될 가능성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밤의 시간을 우리의 시간으로 누구보다 견고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관계성은 해방의 가능성을 품은 힘이지만 세계에 대한 실천적인 개입 없이는 해방은 이룩하지 않는다. 저항과 돌봄은 분리할 수 없지만 투쟁을 제거한 돌봄은 냉소적 태도보다 탈정치화된 위선이자 자족에 불과하다. 대책위 활동이 마지막 토론회까지 견지해 온 변혁적 정의는 “유해한 구조 속에서 한 개인의 무해함이나 해방 따위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공동체 속 남성, 이성, 능력 중심주의를 해체하고 공동체를 재구축하고자 했던 봄을 지나 운동의 주체를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운동이 가능한 운영 체계를 고민했던 여름이 끝나갈 때 즈음에 나는 무언의 무기력함을 느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누구를 대상으로 세계를 변혁하는 실천적 개입을 만들어내야 할지 모르겠는 일종의 진공 상태에서 오는 정치적 무기력함이었다. 그리고 어느 시의 한 구절 처럼 “개같은 가을이 찾아왔다.”


  923 기후정의행진은 한편으로 당위적인 연례 행사 처럼, 한편으로는 우리의 힘이 결집하는 정치적 장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주체를 발굴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923 기후정의행진은 정말이지 연례 행사처럼 공허하게 끝날 것 같았다. 912 삼척 직접행동은 내가 품은 우려를 비웃듯이 우리의 운동을 드러내는 정치적 실험이었다. 시봉과 하은이라는 완전하지 않은 존재들이 포스코와 정부가 공공연히 추진하는 생태학살과 식민주의에 맞서는 저항의 사다리에 올랐을 때 현장은 그 전과는 다른 시간이 흘렀다. 기존의 권력 체제에 저항하고, 함께 오른 타 단체의 동지들과 삼척이라는 현장에 연대할 때 우리는 구체적인 관계와 투쟁에 개입할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직접행동의 가장 큰 의의는 단체 전반에서 표면장력 처럼 팽팽히 감도는 진공상태에 낸 균열이었다. 자신과 거리를 두었던 평화적 선을 넘어서는 정치적 용기는 두명의 레드라인 넘어 옐로라인이었던 나에게도 현장에 없었던 멤버들에게도 희망의 정동을 전했다. 삼척 직접행동에 이어서 인간 외의 존재들을 상품으로서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먹거리 체제와 동물해방 담론을 공론화하는 마주 앉아 밥상회가 진행되었고, 연대 파기와 같은 이후 평가해야할 잡음들이 있었지만 이주 노동자 불법 숙소를 폐지하기 위한 고발이 진행되었으며, 페미니스트 기후정의 선언 기자회견을 통해서 앞으로 기후 운동 내부의 젠더정의에 대한 목소리를 낼 가능성을 엿 볼 수 있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의 9월은 내부에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와 의제들이 드러나는 시간이었고, 앞으로의 운동이 기다려지게 하는 실험 같았다. 그 실험의 종지부는 생태공화국이라는 손 안에 꽁꽁 숨겨뒀던 정치적 패를 꺼내 놓는 것이었고, 생태공화국 부스가 공허하지 않았던 이유는 삼척을 비롯한 여러 활동들에서  “생태적 존재이자 정치적 주체”라는 청년기후긴급행동의 기조가 현실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했기 때문이었다. 



  9월이 청년기후긴급행동 내부적으로 전과는 다른 변화를 가져왔던 반면 923 기후정의행진 자체에 대한 회고를 하기에는 꺼려지는 것이 있다. 나는 기후정의 운동이 기존 체제에서 몫이 없는 이들을 변혁의 주체로 호명하고 공동의 힘을 형성하고 있다는데 있어서 우리도 함께 관계를 형성하고 주체적인 개입을 통하여 전선을 확장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923 기후정의행진에 청년기후긴급행동이 얼마나 개입했는가를 떠올려보면 923 기후정의행진에 대한 책임 있는 평가가 어렵다는 것이다. 집행위를 참여하면서 기조와 요구를 세우고 집회를 조직하는 방식에 있어서, 지금의 파국적 상황을 정치적으로 뚫고 나가며 새로운 주체들을 발굴하고 조직하는 방식이 아닌, 최대한 무난한 요구를 세우고 전년에 비해 늘어난 인원수에 초점을 둔 조직 방식에서 회의감을 느꼈다. 기후정의 운동의 요구를 구체화 시키고 앞으로를 내다보는 사회운동의 결집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지금과 같은 운동 방식 속에서 체제전환이라는 요구는 공허하게만 느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기성 운동을 욕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으며 오히려 무책임한 자세에 가깝다. 집행위에 참여했던 나에게는 숙제로 남았고, 기후정의 운동과 관계 맺고자 하는 것이 조직적 차원에서 봤을 때 우리의 운동이 인정 받아야 한다는 나의 조급함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기도 했다. 923 기후정의행진에 대한 짧은 평가를 남기고, 이에 대한 책임 있는 논의를 앞으로의 자리들에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세계에 던져진 돌과 같다. 자신이 내던져진 지배적 질서에 저항하고 고유한 삶과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작년 924 기후정의행진이 끝나고 이름 모를 외로움에 회현역 근처 벤치에서 전자담배의 액상이 다 떨어질 때까지 줄담배를 피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 토론회와 준비모임을 조직하고 선언문을 작성하는 등 헌신적으로 내 모든 것을 쏟은 투쟁이었지만 행진이 끝나고 찾아온 혼자라는 감각은 쓸쓸했고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올해 923 기후정의행진이 끝나고 나서는 함께 술잔을 채우고 노래를 부를 동지들이 내 곁에 있었다. 여전히 주어진 답이 없는 세계 속에서 과오와 방황을 반복하지만 이제 조금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 것 같다. 내가 살아가고 싶은 세계를 함께 만드는 방법도 알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세계를 향해 투쟁하는 삶을 함께 살고 싶다. 쌀쌀해진 10월의 날씨와 함께 또 다시 일상의 시간은 찾아온다. 더 이상의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공고한 이데올로기를 비웃듯이 “우리가 99%다!” 라고 외치며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인 월가를 점령한 시위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단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간 후 일년에 한번쯤 만나 맥주를 마시면서 향수에 젖어 이 날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 정말 좋았지." 그렇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자.”고 말한다.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거리 연설의 마지막 구절은 행진 하나 끝났다고 자축할 시간이 없으며 한가위의 풍성하게 부른 내 배를 바라보며 잡히지도 않는 이 글을 꾸역꾸역 쓰게 한다. 그 마지막 구절을 전하며 이 글을 맺는다.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전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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