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각한 아픔과 함께, 내 언어 파헤치기_살펴보기
분명, 내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 언어.
또 발견할 수 있는 언어.
발화하지 못할 때 답답함, 두려움, 초조함.
마음 속에 담아두고 애써 외면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도
나는 내 언어를 찾아 헤매는가? 의문이 든다.
최근에 스스로를 계속 의심하는 내가 보인다.
(마음 속에서 너 정말이야? 진짜로?)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속상하다. '나를 믿어달라!'고 외치고 싶다.
나를 믿는 것이 힘들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나를 믿는 누군가를 믿는 관계를 생각해보곤 한다.
책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637쪽을 보면, ‘사람은 언어가 있어야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문장이 있다.
나는 내 의지대로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해보고 싶다, 해야지 하며 넘어가고 넘실대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하고 싶었던 작업을 하는 현장이 삼척 직접행동 후속 활동(사람책 형식)에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의문이고 답답한 부분이 존재해서, 내가 부담을 느끼는 것인가? 생각도 한다.
책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를 읽으며 나는 새로운 시야가 생겼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말하듯 ‘질병은 사회의 여러 구조가 압축적으로 작동하는 장’이라는 것을 피부로 감각할 수 있었다. 더 많은 존재들,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나는 어떻게 말하기를 주저하게 되었는가, 맥락과 상황을 다시 돌아보는 연습을 하고 싶다. 나의 발화를 이어가며 삶을 살고 싶다.
‘고유한 삶의 방식이나 형태’에 다루고 싶었던 저자의 말이 훅 들어오기도 했다.
내가 나의 삶을 돌아보고 해석하는 과정이 또 다른 작용을 만들어낼 수 도 있겠다는 믿음이 돋아난다.
내 삶과 언어가 일치하지 않아 속상하고 울적하더라도, 삶을 나의 언어를 찾아가고 탐구하며 이어가고 싶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걸까?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이 고민들과 앞으로도 쭉 함께 하고싶다. 고민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던 나의 모습을 통해 배운다. 지금 가지고 있는 혼란들을 마주하다보면 차츰 잠잠해질거라고. 나에게 말하고 싶고, 소중한 존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
솔직한 나를 마주하기 두려움
나에게 *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존재한다.
* 부정당하다: 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아니하다고 반대함.
오, 두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것 같다.
누군가 나를 부정하는 것, 나 자신이 나를 부정하는 것.
둘 다 무섭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는 순간이 있고,
내가 나를 부정하고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공존한다.
주저하는, 서성이는, 헤매는 마음 밑에 누군가 싫어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만, 어쩌면 이 순간들이 한겹 한겹 나를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
아픈 몸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아플 수 있지 말하며 돌보는 존재가 아픈 몸이라 생각한다.
아파도 괜찮다고 아픈 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과정이 아픈 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무언가로 인해 생긴 병이 아님을 자신을 둘러싼 '배경'이 어떤지를 생각하고
연약하다면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몸이 아픈 몸이라 생각한다.
나는 ‘자책’이라는 단어에 몸을 떤다.
내가 애정하는 사람이 자책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오고, 내가 자책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감각하곤 한다.
어떠한 일에 책임을 누가 지는가, 중요하게 살펴야 하는 지점이다.
허나, 너무나 쉽게 자신을 탓하도록 하는 구조가 두려우면서 싫다.
모두의 고유한 특징이 존중받는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는(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
나는 요즘 일기를 등한시했다.
일기장이 어디있는지 모르겠는 상황이니 말이다.
나에게 일기를 쓰는 것은 나를 들여다 보는 작업이며 자유롭게 나와 대화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요즘 글을 쓸 때, 무언가 막혀있는 감각을 하는 나.
나를 탓하는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나. (자책과 연결되는 부분)
언어, 단어 하나하나 사용을 조심스럽게,
자연스럽게(긍정의 단어로 치환하는 것) 이어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부정의 기운을 느끼면 나는 불안을 감각한다.
긍정이 부정에 잠식당할까, 두려운 나를 다시금 발견한 오늘 날이기도 하다.
부정이 나쁜 악당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배움을 이어가기도 한다.
부정의 언어를 어떤 마음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적절한 습도와 언어로 치환할지, 그 과정에서 부정의 감정을 배제하지 않는 연습을 하곤 한다.
-
여전히 서툰 감정들이 일렁이는 나.
두렵고 흔들리며 질투를 감각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번 년도에(2023년) 나는 익숙하지 않았던 감정들을 마주하는 날들이었다.
-
아픔은 마음과 몸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감각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몸보다 마음(마음과 몸을 분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고민이다만)의 아픔을 더 먼저 감각하곤 한다.
마음에 집중하는 글이 나에게 무척 필요한터라, 마음으로 글을 이어가려 한다.
마음이 아프면 몸에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신경을 많이 쓰거나 고민이 덥수룩해질 때 목이 붓곤한다.
두려움, 흔들림, 불안이 나에게 아픔이다. 허나, 꼭 필요한 감각들이기도 하다.
이들 없이는 소중함, 감사함, 사랑을 감각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흔들리기에 감사함을 기억하고, 불안하기에 소중함을 되새기며, 두렵기에 사랑을 외치는 것 같다.
-
사랑하는/했던 존재들과 불화하는 마음이 넘친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에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막막하면서도 인연의 끈을 놓고만 싶진 않다.
관계, 참으로 신기하다. 나에게 관계란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과정이다.
한 때 내가 질투했던 사람과 엄마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충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속상했다.
누군가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안 좋게만 바라봤던 것이다.
허나, 그들의 관계는 신뢰가 바탕이었고, 그렇기에 존중하며 의견을 나눴을 것으로 짐작한다.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은 참 소중한 과정이다.
이제는 다른 의견을 무섭게만 바라 보진 않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길 두려워 하는 나지만,
나는 분명 ‘어떻게 내 의견을 뚜렷하게 전달할지’를 배워 가고 있을 것이다.
-
솔직한 마음이 소중하고 중요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워가는 요즘이다.
허나, 또 새롭게 마주한 두려움이 있다. 너무나 솔직해져서 내가 상처를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솟아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지면 걱정이 없겠네.’ 아빠가 자주 읊던 네팔의 속담.
허나, 걱정이 없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걱정과 고민을 헷갈리던 시절이 있다.
내가 이어가는 책방 모임에서 명쾌한 답을 듣던 기억이 난다.
‘고민은 의미있는 생각의 과정이고, 걱정은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는 것’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말이었다.
요즘 발견한 나의 습, 관성이 있다. 누군가 ‘그건 이렇다’ 말하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곤 한다.
허나, 다시 한번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배제되어선 안되겠다고 깨달았다.
나의 삶을 나의 언어로 채워가고 싶은 욕구가 있다.
나의 언어는 내가 무언가를 정의하면서 시작하는 여정이다. 나의 여정을 혼자 걷고 싶지 않다.
다양한 길이 교차하며 흔들리고 무너지길 두려워하지 않으며 넘어지며 배우고 싶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
더 확실하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
무언가 확실하지 않으면 불안감 일어난다.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머리에 남았던 문장, '불안감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끌려 가는 길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
책임감에 조급함이 몰려오는 순간이 존재할 수 있지만, 차근차근 살펴보는 태도를 지니며 살고 싶다.
서로 돌보고 믿음을 감각하며 우리의 길을 가고 싶다.
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나에게 긴급행동은 안전망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차근차근 잘하고 있다.
뒤뚱뒤뚱
+ 김공룡 야학을 함께하며 들었던 생각, 마음을 글로 조각조각 남겨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감각한 아픔과 함께, 내 언어 파헤치기_살펴보기
분명, 내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 언어.
또 발견할 수 있는 언어.
발화하지 못할 때 답답함, 두려움, 초조함.
마음 속에 담아두고 애써 외면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도
나는 내 언어를 찾아 헤매는가? 의문이 든다.
최근에 스스로를 계속 의심하는 내가 보인다.
(마음 속에서 너 정말이야? 진짜로?)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속상하다. '나를 믿어달라!'고 외치고 싶다.
나를 믿는 것이 힘들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나를 믿는 누군가를 믿는 관계를 생각해보곤 한다.
책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637쪽을 보면, ‘사람은 언어가 있어야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문장이 있다.
나는 내 의지대로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해보고 싶다, 해야지 하며 넘어가고 넘실대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하고 싶었던 작업을 하는 현장이 삼척 직접행동 후속 활동(사람책 형식)에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의문이고 답답한 부분이 존재해서, 내가 부담을 느끼는 것인가? 생각도 한다.
책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를 읽으며 나는 새로운 시야가 생겼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말하듯 ‘질병은 사회의 여러 구조가 압축적으로 작동하는 장’이라는 것을 피부로 감각할 수 있었다. 더 많은 존재들,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나는 어떻게 말하기를 주저하게 되었는가, 맥락과 상황을 다시 돌아보는 연습을 하고 싶다. 나의 발화를 이어가며 삶을 살고 싶다.
‘고유한 삶의 방식이나 형태’에 다루고 싶었던 저자의 말이 훅 들어오기도 했다.
내가 나의 삶을 돌아보고 해석하는 과정이 또 다른 작용을 만들어낼 수 도 있겠다는 믿음이 돋아난다.
내 삶과 언어가 일치하지 않아 속상하고 울적하더라도, 삶을 나의 언어를 찾아가고 탐구하며 이어가고 싶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걸까?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이 고민들과 앞으로도 쭉 함께 하고싶다. 고민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던 나의 모습을 통해 배운다. 지금 가지고 있는 혼란들을 마주하다보면 차츰 잠잠해질거라고. 나에게 말하고 싶고, 소중한 존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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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나를 마주하기 두려움
나에게 *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존재한다.
* 부정당하다: 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아니하다고 반대함.
오, 두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것 같다.
누군가 나를 부정하는 것, 나 자신이 나를 부정하는 것.
둘 다 무섭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는 순간이 있고,
내가 나를 부정하고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공존한다.
주저하는, 서성이는, 헤매는 마음 밑에 누군가 싫어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만, 어쩌면 이 순간들이 한겹 한겹 나를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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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아플 수 있지 말하며 돌보는 존재가 아픈 몸이라 생각한다.
아파도 괜찮다고 아픈 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과정이 아픈 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무언가로 인해 생긴 병이 아님을 자신을 둘러싼 '배경'이 어떤지를 생각하고
연약하다면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몸이 아픈 몸이라 생각한다.
나는 ‘자책’이라는 단어에 몸을 떤다.
내가 애정하는 사람이 자책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오고, 내가 자책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감각하곤 한다.
어떠한 일에 책임을 누가 지는가, 중요하게 살펴야 하는 지점이다.
허나, 너무나 쉽게 자신을 탓하도록 하는 구조가 두려우면서 싫다.
모두의 고유한 특징이 존중받는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는(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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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일기를 등한시했다.
일기장이 어디있는지 모르겠는 상황이니 말이다.
나에게 일기를 쓰는 것은 나를 들여다 보는 작업이며 자유롭게 나와 대화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요즘 글을 쓸 때, 무언가 막혀있는 감각을 하는 나.
나를 탓하는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나. (자책과 연결되는 부분)
언어, 단어 하나하나 사용을 조심스럽게,
자연스럽게(긍정의 단어로 치환하는 것) 이어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부정의 기운을 느끼면 나는 불안을 감각한다.
긍정이 부정에 잠식당할까, 두려운 나를 다시금 발견한 오늘 날이기도 하다.
부정이 나쁜 악당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배움을 이어가기도 한다.
부정의 언어를 어떤 마음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적절한 습도와 언어로 치환할지, 그 과정에서 부정의 감정을 배제하지 않는 연습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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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서툰 감정들이 일렁이는 나.
두렵고 흔들리며 질투를 감각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번 년도에(2023년) 나는 익숙하지 않았던 감정들을 마주하는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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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마음과 몸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감각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몸보다 마음(마음과 몸을 분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고민이다만)의 아픔을 더 먼저 감각하곤 한다.
마음에 집중하는 글이 나에게 무척 필요한터라, 마음으로 글을 이어가려 한다.
마음이 아프면 몸에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신경을 많이 쓰거나 고민이 덥수룩해질 때 목이 붓곤한다.
두려움, 흔들림, 불안이 나에게 아픔이다. 허나, 꼭 필요한 감각들이기도 하다.
이들 없이는 소중함, 감사함, 사랑을 감각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흔들리기에 감사함을 기억하고, 불안하기에 소중함을 되새기며, 두렵기에 사랑을 외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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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했던 존재들과 불화하는 마음이 넘친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에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막막하면서도 인연의 끈을 놓고만 싶진 않다.
관계, 참으로 신기하다. 나에게 관계란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과정이다.
한 때 내가 질투했던 사람과 엄마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충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속상했다.
누군가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안 좋게만 바라봤던 것이다.
허나, 그들의 관계는 신뢰가 바탕이었고, 그렇기에 존중하며 의견을 나눴을 것으로 짐작한다.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은 참 소중한 과정이다.
이제는 다른 의견을 무섭게만 바라 보진 않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길 두려워 하는 나지만,
나는 분명 ‘어떻게 내 의견을 뚜렷하게 전달할지’를 배워 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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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마음이 소중하고 중요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워가는 요즘이다.
허나, 또 새롭게 마주한 두려움이 있다. 너무나 솔직해져서 내가 상처를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솟아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지면 걱정이 없겠네.’ 아빠가 자주 읊던 네팔의 속담.
허나, 걱정이 없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걱정과 고민을 헷갈리던 시절이 있다.
내가 이어가는 책방 모임에서 명쾌한 답을 듣던 기억이 난다.
‘고민은 의미있는 생각의 과정이고, 걱정은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는 것’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말이었다.
요즘 발견한 나의 습, 관성이 있다. 누군가 ‘그건 이렇다’ 말하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곤 한다.
허나, 다시 한번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배제되어선 안되겠다고 깨달았다.
나의 삶을 나의 언어로 채워가고 싶은 욕구가 있다.
나의 언어는 내가 무언가를 정의하면서 시작하는 여정이다. 나의 여정을 혼자 걷고 싶지 않다.
다양한 길이 교차하며 흔들리고 무너지길 두려워하지 않으며 넘어지며 배우고 싶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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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확실하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
무언가 확실하지 않으면 불안감 일어난다.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머리에 남았던 문장, '불안감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끌려 가는 길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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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에 조급함이 몰려오는 순간이 존재할 수 있지만, 차근차근 살펴보는 태도를 지니며 살고 싶다.
서로 돌보고 믿음을 감각하며 우리의 길을 가고 싶다.
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나에게 긴급행동은 안전망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차근차근 잘하고 있다.
뒤뚱뒤뚱
+ 김공룡 야학을 함께하며 들었던 생각, 마음을 글로 조각조각 남겨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