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자율기고[231103] 2020년 겨울의 속헹, 2023년 여름의 채수근

강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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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살을 에는 한파가 포천에 닥쳤다. 캄보디아에서 온 채소농장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잠든 노동자 속헹. 30세에 사망. 

2023년 7월, 유례 없는 폭우가 예천에 쏟아졌다. 실종자 수색에 투입된 2개월차 해병대 병사 채수근. 20세에 사망.


2020년 12월 청년기후긴급행동 텔레그램방에 긴급 기자회견 소식이 하나 올라왔다. 지난 밤 포천에서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가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동사했다는 것이다. 기자회견이 두 군데에서 열렸다. 전체방에 기자회견 소식을 공유해 줬던 청연은 나와 다른 장소로 갔다. 청연은 이날 기자회견장에서 김달성 목사님을 만났고, <파랑 검정 빨강: 코리아 내부 식민지 이주노동자 이야기>라는 책을 선물로 받아 전해 주었다.


너무너무 추워서 귀 떨어질 것만 같던 겨울날. 아빠 차를 얻어타고 포천경찰서 앞 기자회견장에 찾아갔다. 둘이 쭈뼛쭈뼛 도로변에 서서 기자회견을 들었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신 활동가 분 덕분에 기자회견문을 얻어 읽고 다시 돌아왔다.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이름은 ‘속헹’이었다. 비통한 마음에 잠겼다. 매년 찾아오는 겨울 추위가 유독 살벌하게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마음이 내내 답답했다. 불평등한 한국 사회 구조와 기후변화로 인해 극심해지는 한파가 만나 발생한 사건을 마주하니 기후위기는 미래의 문제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을 절감하게 되었다.


2023년 김달성 목사님의 치열하고 성실한 기록 덕분에 2020년 속헹 님의 이야기가 담긴 책 <얼어붙은 속헹>이 출간되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는 멤버들과 시행 착오를 거듭하고 고군분투하며 어렵게 어렵게, 정말 어렵게 연대의 길을 내고 있다. 김달성 목사님의 연결을 통해 청년기후긴급행동은 이번 주말 채소 농장 이주노동자 두 분을 만날 예정이다. 한 번은 목사님께서 긴급행동이 이주노동자 문제까지 다루기엔 역량이 부족하지 않은지, 기존 ‘환경운동’에 집중하는 게 더 낫지 않은지 냉정하게 말씀해 주신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서툴고 느리더라도 단념하지 않았으면 한다.


2019년 기후위기비상행동 거리 집회에 참여한 이후 ’기후위기 앞에 침묵하지 말아야지‘ 하고 사회운동에 뛰어든지 4년. 그 동안 많은 일들을 겪고, 해내고, 많은 동지들을 만났다.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답답함과 절박함을 느낀다. 2023년 7월 15일 유례 없던 예천의 폭우, 실종자 수색을 위해 투입된 채수근 상병의 죽음, 8월 박정훈 수사단장의 보직 해임, 10월 25일 생존 병사의 해병대 1사단장 공수처 고소는 올 여름부터 지금까지 신경을 곤두세워 살피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그러나 내가 몸 담고 있는 기후운동 진영에는 고사하고, 개인 SNS에 한 조각 글을 남기기에도 경황이 없다. 연대와 투쟁은커녕 문제제기할 새도 없다. 이미 다루고 있는 현안으로도 벅차서 폭우 참사 성명에 채수근 상병의 죽음을 언급한 정도가 전부다. 머리가 멍해진다.


한 없이 막막하고 늘 부족하지만 오늘도 호흡을 가다듬는다. 기후위기를 언급하며 언론이 포착하는 장면들은 어쩌면 ‘현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은 이 땅에서 드러나고 또 사라지고 가라앉는 수많은 삶들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 우리에겐 해외 국가들의 선거승리 사례도, 모범정책 사례도 필요할 수 있다. 유명인사의 한 마디도, 공신력 있는 UN 사무총장의 경고도, 지구 행성의 한계가 붕괴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통계도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하다.


일이관지(一以貫之) 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이 없다는 의미다. 어떻게든 가족, 친구를 포함한 동지들과 마음을 나누고, 지혜를 모으고, 용기를 얻고, 침묵하지 않고, 예의주시하고, 기억하고, 말하고, 연결하고, 꿰뚫어 낼 것이다. 착취와 억압이 온 생명을 지배하는 사회 구조 아래 우리는 아프고 또 아프다. 그래서 서로를 아프게 한다. 이 또한 아프다. 이제 지구 곳곳에서 위기는 일상이 되었다. 이주노동자, 군인을 포함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내몰린 저마다의 삶을 들여다 본다. 죽음과 폭력 앞에 자유로울 수 없고, 침묵과 방관으로 내몰리는 나의 삶과 겹쳐 보인다. 세상에 관심도 많고 사랑도 많지만, 취업과 학업과 생계를 무시할 수 없는 친구들의 치열한 삶이 겹쳐 보인다. 내가 못 견디는 아픔이 누군가의 아픔과도 분명 맞닿아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두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고, 깊이 애도한다.

살아 있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위) 경향신문, (아래)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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