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에 둘러싸인 틈으로 겨울 햇빛이 스며들었다. 컴컴한 몇 평의 방에 가늘고 네모난 빛줄기가 들어 찼다. 그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컨디션 어때요? 저는 좋아요. 안온한 하루 보내세요!
늘상 건네는 말.
아. 아… 아파. 힘들어. 피곤해. 죽을 것 같아.
내가 제일 많이 하는 말. 동시에 소리내어 전달하지 않는 말.
굳이 힘을 들인다. 관성적으로도 소리내지 않도록 마음의 입을 막는다. 사연없는 이가 어디 있겠냐만은 꽤나 활동적이고, 긍정적이고 밝게 비추어지는 나도 고충이 있다. 종종 폭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말들로 내 지난 15년을 함축한다. 무거운 단어를 고를 수 밖에 없지만 어조와 표정을 밝게 해서 중화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내가 너무 담담하고 밝게 말해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대수롭지 않게 수고했다며 잔을 부딪쳐도 되는지 듣는 상대가 눈치를 볼 정도다. 이 글에서도 얼른 레퍼토리를 풀어내고 ‘현재’에 집중하려 한다.
내 삶이라는 극 안에는 메인 빌런이 늘 고정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친부라 불리는 그 이는 내 인생이라는 대하 드라마 안에서 일찍이 퇴장했음에도 흉터로 남아있다. 그의 불륜에서 시작해 이혼, 부정당한 내 존재, 재혼과 재판, 입양, 학교 폭력까지 몇 단어로 차마 함축할 수 없는 여러 일상을 지냈다. 특히 이 메인 빌런의 존재로 인해 나는 때로는 불쌍하게, 때로는 자유롭게, 때로는 방치되어 길러졌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정서적으로 혼자되고 싶지 않다는 분리불안 중기와 ‘잘 태어났다, 참 도움이 되었다, 쓸모있다’는 말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인정투쟁 말기를 보내고 있다. 그 외에 만성적으로 위경련과 수면장애를 앓고 있고, 잊어버릴 때 쯤 공황장애와 자해 충동이 찾아온다. 불행 중 다행인지 긴급행동에서는 활동과 실무를 해도 분리불안과 인정투쟁이 심화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내가 방법을 찾은 것인지, 잠시 미뤄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타자에게 관대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는 몇 달간 아픈 몸에 관해 공부하며 아프다는 말을 조금 더 자주, 솔직히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나는 아픈 몸을 가지고 아픈 세상을 사는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어디 한구석인가 아프다. 세상은 존재를 아프게 하는 구조로 굴러가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플 수 밖에 없다. 네모난 세상 속에서 각기 다른 형체를 가진 우리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세상에 발맞춰 네모난 춤을 추지 않고 둥근 춤을 추기로 마음을 모은 우리이기에. 더욱 아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픈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먼저, 일상적으로 아프다고 외치는 것에서 시작하자. ‘아프다’는 말은 엄청난 무게를 갖거나 감춰야 할 것 또는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밖에는, 흘러나와야 하는 말이다. 소리내는 것에 겁먹지 말고 외쳐보자. 그리고 각기 다른 아픔을 경청할 줄 알자. 상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은 곧 아픔에 공감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는 심리적 거리가 있음에도 ‘있는 힘껏 당신의 아픔에 가닿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이렇듯, 아픈 몸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아프다고 외치는 용기, 기꺼이 내 시공간을 내어 경청하려는 의지와 공감, 이를 통해 이뤄지는 신뢰가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와 더불어 우리가 함께 품을 내어 활동하는 긴급행동에서도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약속이 필요하다. 해마다 바뀌지 않고 계속해서 가치로 가져가야 할 ‘공동체 약속’. 이런 면에서 희원이 <21세기 상호부조론>을 읽고 제안해준 지침들이 마음에 쏙 든다. 공동체 약속을 바탕으로 각종 회의와 모임, 직접행동을 하는 그런 줏대있는 단체가 되면 좋겠다. 공간과 마음으로 만나는 만남, 개성 가득한 이들끼리 물과 기름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닌 물과 물의 흐름처럼 섞이는 만남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 글을 읽는 모두 일상적으로 아픔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아픔을 말하지 못해서 더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나 역시 아픔을 발화해서 더 열심히 감각할 것을 약속하겠다.
빌라에 둘러싸인 틈으로 겨울 햇빛이 스며들었다. 컴컴한 몇 평의 방에 가늘고 네모난 빛줄기가 들어 찼다. 그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컨디션 어때요? 저는 좋아요. 안온한 하루 보내세요!
늘상 건네는 말.
아. 아… 아파. 힘들어. 피곤해. 죽을 것 같아.
내가 제일 많이 하는 말. 동시에 소리내어 전달하지 않는 말.
굳이 힘을 들인다. 관성적으로도 소리내지 않도록 마음의 입을 막는다. 사연없는 이가 어디 있겠냐만은 꽤나 활동적이고, 긍정적이고 밝게 비추어지는 나도 고충이 있다. 종종 폭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말들로 내 지난 15년을 함축한다. 무거운 단어를 고를 수 밖에 없지만 어조와 표정을 밝게 해서 중화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내가 너무 담담하고 밝게 말해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대수롭지 않게 수고했다며 잔을 부딪쳐도 되는지 듣는 상대가 눈치를 볼 정도다. 이 글에서도 얼른 레퍼토리를 풀어내고 ‘현재’에 집중하려 한다.
내 삶이라는 극 안에는 메인 빌런이 늘 고정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친부라 불리는 그 이는 내 인생이라는 대하 드라마 안에서 일찍이 퇴장했음에도 흉터로 남아있다. 그의 불륜에서 시작해 이혼, 부정당한 내 존재, 재혼과 재판, 입양, 학교 폭력까지 몇 단어로 차마 함축할 수 없는 여러 일상을 지냈다. 특히 이 메인 빌런의 존재로 인해 나는 때로는 불쌍하게, 때로는 자유롭게, 때로는 방치되어 길러졌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정서적으로 혼자되고 싶지 않다는 분리불안 중기와 ‘잘 태어났다, 참 도움이 되었다, 쓸모있다’는 말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인정투쟁 말기를 보내고 있다. 그 외에 만성적으로 위경련과 수면장애를 앓고 있고, 잊어버릴 때 쯤 공황장애와 자해 충동이 찾아온다. 불행 중 다행인지 긴급행동에서는 활동과 실무를 해도 분리불안과 인정투쟁이 심화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내가 방법을 찾은 것인지, 잠시 미뤄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타자에게 관대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는 몇 달간 아픈 몸에 관해 공부하며 아프다는 말을 조금 더 자주, 솔직히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나는 아픈 몸을 가지고 아픈 세상을 사는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어디 한구석인가 아프다. 세상은 존재를 아프게 하는 구조로 굴러가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플 수 밖에 없다. 네모난 세상 속에서 각기 다른 형체를 가진 우리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세상에 발맞춰 네모난 춤을 추지 않고 둥근 춤을 추기로 마음을 모은 우리이기에. 더욱 아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픈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먼저, 일상적으로 아프다고 외치는 것에서 시작하자. ‘아프다’는 말은 엄청난 무게를 갖거나 감춰야 할 것 또는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밖에는, 흘러나와야 하는 말이다. 소리내는 것에 겁먹지 말고 외쳐보자. 그리고 각기 다른 아픔을 경청할 줄 알자. 상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은 곧 아픔에 공감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는 심리적 거리가 있음에도 ‘있는 힘껏 당신의 아픔에 가닿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이렇듯, 아픈 몸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아프다고 외치는 용기, 기꺼이 내 시공간을 내어 경청하려는 의지와 공감, 이를 통해 이뤄지는 신뢰가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와 더불어 우리가 함께 품을 내어 활동하는 긴급행동에서도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약속이 필요하다. 해마다 바뀌지 않고 계속해서 가치로 가져가야 할 ‘공동체 약속’. 이런 면에서 희원이 <21세기 상호부조론>을 읽고 제안해준 지침들이 마음에 쏙 든다. 공동체 약속을 바탕으로 각종 회의와 모임, 직접행동을 하는 그런 줏대있는 단체가 되면 좋겠다. 공간과 마음으로 만나는 만남, 개성 가득한 이들끼리 물과 기름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닌 물과 물의 흐름처럼 섞이는 만남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 글을 읽는 모두 일상적으로 아픔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아픔을 말하지 못해서 더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나 역시 아픔을 발화해서 더 열심히 감각할 것을 약속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