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자율기고[231101] 난설헌의 고민에 응답하기 - 당사자성의 대립에 관하여

박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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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스스로에게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고민이 굉장히 오래 지속됨. … 같이 발언하러 다니고 같이 싸우러 다니고 하다가. 이것도 지쳐버렸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를 계속 타자화하고 있는 것 아닌가 고민도 했고. 그러면서도 외부연대는 열심히 다니면서 이질감. … 또다른 고민은, …  정당이라는 위치성과 위원장이라는 위치성, 또 나라는 위치성이 엮이면서 대가리 아픈 시간들 보냄. 연대라는 게 매우 복잡하고, 너는 연대자일 뿐이야 하는 위치성에서 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고.  …  당사자 분들이 너희들은 결국 이 운동을 이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 하셨을 때 굉장히 마음아프기도 했고. 추모제 현장 가면 문제소지 있는 발언들 자주 나오고 하는데. 나의 자식이 고학력으로 살아왔고 살아갈 것인데, 현장에서 비판 못한다. 그것도 타자화라고 생각한다. …  몇달 전 인상 깊었던 현장이 난민분이 이제 비인간 동물에 대해서 문제되는 발언하심. 옆에 있는 토론자분이 발언의 문제점 현장에서 바로 하심. 그게 진짜 연대라고 생각하는데, 실제 그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가. …  외부연대 멈추고 내부 성찰 할 시기 아니냐고 했지만. 외부 연대 멈출 정도로 성찰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성찰은 하되 외부와 어떻게 연대할지 고민해야 한다."

- 난설헌 발언, 이주노동자 연대 중간점검 공론장 속기록 중


난설헌의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폭우참사 때 함께 활동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긴급행동의 이름으로 함께 피켓팅을 하고, 어쩌다 우연히 국회의원을 만나기도 하고, 뒤풀이도 함께 하고, 대표로 발언을 하는 난설헌을 바라보기도 하며 해소되지 않았던 궁금증들이 이 발언으로 일부나마 이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대항전선에서 연대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연 공론장에서 우리 조직 자체에 대한 회고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연대'라는 키워드를 놓고 고민하는 멤버들의 생각들이 너무나 궁금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난설헌의 얘기에 응답해야겠다!라고 공론장 때 생각해 2부를 진행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1부가 길어지고 2부를 이어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아 더 얘기하지 못해 아쉬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몇 글자 남겨봅니다.


저도 당사자운동의 영역에 오랫동만 머물면서, 장애 뿐만이 아니라 젠더, 그 안에서도 다양한 성차에 따른 다양한 운동을 경험하면서 당사자성에 대한 고민이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비당사자성을 여럿 지니고 있는 입장에서 당사자성에 대한 질문은 내가 어떤 응답을 해야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는 주요한 계기였던 듯합니다. 그러다 내린 잠정적 결론은 "비당사자란 없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당사자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린 살아가면서 과연 100% 헤테로인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과연 100%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존재할까. 고민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 100%를 유지하기 위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서 억압받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죠. 저는 "페미니즘의 목표는 남성해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남성도 성이기 때문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장애인인 제가, 그것도 장애라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의료를 수행하는 제가 장애운동을 하는 이유는 그런 제가 장애운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난설헌의 고민을 생각해보면, 과연 난설헌이 말하는 '연대'는 왜 자신의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그' 연대가 누구의 것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난설헌이 정당이란 키워드를 제시해주었기에 정당을 중심으로 답을 한번 고민해보자면, 저는 정당운동이 어느새 연대운동에 메몰된 것은 이데올로기적 운동을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어느 지역을 가든 플랜카드에 '중산층이여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식의 여당식 플랜카드와, '홍범도 장군을 지킵시다!' 같은 야당식 플랜카드만이 걸려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그게 왜 지역 정치인이, 지역위원회가 붙여야할 것이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역 정치는 지역의 필요에 응답하는 메시지를 내야 하죠. 정치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노동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분배에 신경써왔지, '필요'란 무엇인지를 덜 고민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필요란 종종 욕망으로, 규제해야 할 것으로 다루어져왔습니다. 어떻게 필요를 발굴하고 누구의 필요를 들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저는 정치의 주된 의제로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이러한 지점이 정당운동 자체가 진보운동의 상위구조 역할을 자처하면서 발생한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블록이란 표현을 쓰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형식적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 중심으로 비제도적 영역에서 이루어져오던 사회연대를 정당제도의 영역으로 이전하려는 시도 속에서 여러 사회 운동의 상위 구조임을 천명했으나, 그만큼의 아래서부터의 하부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기에 모래 위에 성을 쌓듯 무너져내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후정치세력화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도, 사실은 기후영역 말고도 정치세력화에 대한 고민이 온 영역에 걸쳐서 나오는 이유도 우리 사회가 아래서부터의 정치에 대한 경험이 아직 부족한 현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어떻게 분배할까에 대한 고민도 상위 구조를 자처할 때 할 수 있는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충족시키고자 하는 필요란 과연 누구의 것인가란 고민은 그 '누구'이 자신의 위치에서 비로소 얘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저는 지역정치, 인정정치의 영역이 우리나라에서는 약한 이유가 '필요'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당사자성은 보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사자성은 각자가 살아온 맥락과 놓인 조건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기에 맥락과 조건이 형성되는 현장, 즉 구체적인 삶의 과정에 같이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저도 당사자 운동에 머무르면서 활동하고 있지만, 당사자성이 충돌한다고 보일 때 왜 개별적인 욕구가 한 개인의 삶에서 충돌되는 것처럼 보일까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난설헌이 이야기한 지점, 왜 참사는 성장주의와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나타나는데, 그 피해자는 학력주의를 언급할까. 또는 난민이 비국민으로서 불인정되는 문제는 비인간동물이 비인간으로서 불인정되는 문제와 일치하는 데 왜 육식주의를 언급할까. 이렇게 충돌되는 지점이 보일 때 우리는 가끔 너무도 쉬운 방식으로, 당사자주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야라고 스스로 답을 내려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서 내가 보지 못한 그 사람의 당사자성을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평생 살던 시설에서 나와, 누군가를 내가 초대할 수 있는 공간에서 살아가보고 싶다. 그리고 초대만 하는게 아니라 대접하고 싶다."라는 욕구를 지닌 장애인은 그 대접이 고기를 구워주는 것으로 귀결될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활동가들은 많이 초대를 받고는 하죠. 그럴 때 저는 장애인 거주시설과 축산업의 시설로서의 교차성, 혹은 장애인의 신체와 비인간동물의 몸에서의 교차성을 강조하며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할 것이기 보다는 그 사람이 고기를 구워주는 게 대접한다고 생각하는 삶의 맥락을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육식 소비주의에 물들어서!라고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고, 그 사람은 소비 이상으로 지역사회에서 환대할 역량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새롭게 비장애중심주의 사회를 해석하고 조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전장연 사무실이 있는 건물 4층에는 들다방이라는 공간이 있습니다. 들다방은 카페와 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카페는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노동환경을 구성하고 있으며, 식당은 2층에 있는 노들장애인야학의 장애인당사자 학생분들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지요. 그 식당의 가격은 6천원, 그것도 뷔폐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메뉴도 논비건, 비건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노들장애인야학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공할 수 있도록 후원 시기가 되면 활동가들이 정말 애타게 후원티켓을 판매하고 다닙니다. 다년 간의 운영 경험, 노들장애인야학 학생 및 건물에서 근무하는 활동가들과의 신뢰(이 신뢰는 구체적으로 코로나로 인해 운영이 어렵던 시기 단체들의 비용을 들여 식권을 의무적으로 구매하기로 한 결의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 단체들도 코로나로 인해 추가 지출이 들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후원기금 등 다양한 역량들이 모여 비건식으로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고민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의 삶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그들의 삶을 제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역량이 될 수 있는 장소에서 비건식이 제공되기까지 정말 힘겹고 어려운 길을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장애인당사자의 현장이 자신의 현장과 일치함을 느끼고 그 지점에서 연대를 고민한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나와 다른 당사자성을 지니고 있어보이는 이,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장에 뛰어들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여력이 있는가. 그리고 과연 그 삶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자체를 연대의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대란 사실 그 대상의 문제에 함께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의 당사자성이 나의 삶을 비춰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실 문제는 연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연대를 행하는 주체인 나, 혹은 내 조직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설헌이 이야기한 "성찰은 하되 외부와 어떻게 연대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동의하는 이유는 외부와의 연대가 곧 성찰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대를 하는 이유는 예전에 제가 대항전선 기획연재글에 썼듯 결국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의 해방이 진정 그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감각할 수 있으려면 긴밀한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이 긴밀한 관계는 자신의 위치성을 변화시키는 것을 선결조건으로 합니다. 내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위치에 계속 있고 싶은데 여기서 벗어나고, 그 위치에서만 할 수 있는 생각과 고민을 벗어던지고 현장으로 뛰어들라고 얘기하죠. 하지만 지구해방의 날 공동선언문에서 얘기하듯, 땅과 나무에 몸을 당장 기대려고 하면 내가 열심히 씻고 빨았던 옷과 몸이 더렵혀질까봐, 혹은 땅에 벌레가 기어다니고 분변이 묻을 수도 있을까봐 걱정되지만 막상 닿으면 너무나 푸근하고 안락해지듯이, 비로소 지구의 숨결과 박동이 들리기 시작하듯이, 내가 걱정했던 것만큼 더렵혀지지 않듯이 긴밀한 관계는 꽤나 괜찮은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긴급행동에서의 연대가 난설헌의 것일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땅과 나무에 몸을 기대어봅시다.

조금씩 닿으면 두렵고 낯설지만, 온 몸을 맡기면

축축함은 푸근함으로, 딱딱함은 안락함으로 변해갑니다.

- <청년기후긴급행동 지구해방의 날 공동선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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