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을 따라가기
정이어린 (25. 03. 31.)
많은 기사들이 산불의 주요 원인으로 농민들의 봄철 관행소각을 지적하고 있다. 한 기사는 "고령의 어르신들은 누가 말려도 금세 또 불을 피운다."라면서 처벌 강화를 주장한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도 인터뷰에서 이를 '잘못된 생각'이라고 경고했다. 지역 현장의 소방관 분들은 충분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기자들과 정책입안자, 학자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면 모든 책임을 농촌의 고령 노인들에게 전가하는 일이 된다. 도시에서 발생한 산업폐기물의 대부분을 농촌에서 외주화 하며 국가가 책임져 온 것과 달리 농촌에서 발생한 폐기물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쯤으로 취급해 온 사실은 금세 사라지고 없다.
밭과 논에 불을 놓는 일이 수천 년 전부터 이뤄졌음에도 왜 이제 와서 이렇게 큰 산불을 만들어내는지 그들 중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들불'은 오히려 농경 공동체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섬세하게 사용되었고, 산불의 연료가 쌓이는 것을 방지하고 토양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 국내 산불 원인의 30%가량이 영농폐기물을 태우고 논밭에 불을 놓으면서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농촌에서의 방화가 초대형 산불로까지 번지는 이유는 사회가 산을 대해온 방식을 빼놓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산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관리되어 온 산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산의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거나 화전 경작을 함으로써 숲의 밀도가 낮게 유지되었지만(지배계층의 억압으로 늘어난 조선 후기의 화전민과 그로 인해 황폐화된 산림을 낭만화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산업화 과정에서 숲을 가꾸며 살아온 많은 농민들이 사라지고, 그동안 쉽게 드나들지 않았던 깊은 산까지 인간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떠나고 난 뒤 숲은 산림청 산하의 국유림이 되거나 매매의 대상인 사유림이 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의 인클로저는 농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숲 속에서도 진행된 것이다.
오늘날 산림청은 매년 2000억 원가량의 예산을 투입하여 '숲 가꾸기', '임도 확장' 등의 사업을 진행하는데, 이는 침엽수의 확대와 침엽수림에서 자라는 송이나 잣, 목재 등의 임업 생산물을 최대화하면서 숲을 이윤 추구에 복무하도록 하는 플랜테이션 사업이다. 사유림의 산주들 또한 경제적 동기로 인해 침엽수림을 그 과정에서 산은 산사태와 산불에 취약해진다. 결국 그로 인하여 재난에 노출되는 건 산 주변에서 살아가는 농촌, 산촌 지역의 거주자들이다. 홍석환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그러한 산림청의 여러 비리와 부패를 꼬집으며 산림 경영 정책에 대해 비판해 왔다. 그렇다면 침엽수가 아니라 활엽수를 더 많이 심는 등 산림 관리 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인 것은 아닐까?
강원일보의 신하림 기자가 쓴 산불 관련 기획 기사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22년 동해안 산불 피해 이후 대부분의 산주들은 조림 희망 수종으로 임업 생산이 용이한 침엽수를 다시 선택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산불의 원인이 침엽수 중심의 조림 정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는 침엽수림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이 있다는 걸 때문이다. 실제로 신하림 기자가 쓴 <산불은 마을을 어떻게 바꿨나>에도 산불로 침엽수림을 잃은 이후 송이 채취가 어려워져 수입이 불안정해졌다는 한 주민의 이야기가 나온다. 산림 관리 정책은 누군가의 생존권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 수도권 중심, 도시 중심의 경제구조가 비수도권 지역의 주민들로 하여금 산불이라는 재난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산불의 원인과 결과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책임 전가는 오히려 문제 그 자체인 기존 체제를 재생산한다. 예를 들어, 소방 장비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조엘 자스크(숲이 불탈 때, 2025)가 말한 '불 산업 복합체'의 이윤으로 귀결될 수 있다. 벌써 수천억 원 대의 헬기와 드론 등의 진화 장비를 구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다. 이재 산림청은 임도를 이번 산불을 적절한 통제의 실패로 바라보고 보다 완벽한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자연을 보존 또는 자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관리주의적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저 산불의 원인은 어느 부주의한 농민의 실수만도, 단지 잘못된 산림관리 정책 때문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초대형 산불이라는 끔찍한 재난의 불씨를 가진 숲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노동과 산업과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상호 의존관계에 있을 것이다. 다른 방식의 관계, 삶을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려는 상상과 실천만이 이 불길을 다르게 흐를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 추상적이고 모호할 수 있음을 알지만, 나는 언제나 이런 복잡한 재난 속에서는 쉬운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항상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산불 현장에 가본 적 없고, 산불이 무엇인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뉴스와 신문기사를 통해 활활 타올라 재가 된 숲의 잔해와 이재민들의 선별된 고통을 듣고 볼 수 있었던 도시인일 뿐이다. 도시에 산다는 건 숲과 산을 한 몸처럼 여기기보다는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늘 낭만화의 위험을 수반하며, 생태주의적인 시선도 그러한 위험을 피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내가, 그리고 우리가 낮은 곳에서부터 덮쳐오는 재앙 속에서부터 길어진 말하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더 나은 질문은 무엇일까 고민할 뿐이다. 산불이 지나간 후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산불은 누구에게 더 가혹한지, 산불 피해로 일상을 잃은 이재민들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정부의 이재민 대책은 또 다른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저 물음을 포기하지 않을 뿐이다. 곧 시간을 내 동료들과 함께 산불이 일어난 곳에 가봐야겠다.

쓰면서 읽은 것들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2017)
신하림, 산불은 마을을 어떻게 바꿨나(2024)
조엘 자스크, 숲이 불탈 때(2025)
정은정, "산불과 농촌쓰레기 실화", 경향신문, 2023-03-17
장수지, "영농폐기물, 사각지대 속 처리 곤란 여전", 한국농정신문, 2023.04.02
장윤우, "숲 가꾸기가 우리 숲에 도움 된다?", 노컷뉴스, 2024-07-25
강은선, "산 사들이는 개인 매년 증가… 매입 규모 클수록 이 지역에 몰리다", 세계일보, 2024-08-03
이송희일, "불타는 LA를 보라", 참세상, 2025.01.24
신하림, "불쏘시개 역할 ‘침엽수’들은 왜 ‘활엽수’으로 바뀌지 못할까", 강원일보, 2023-03-09
홍석환, "산불 키우는 산림청, 숲에서 답을 보라", 창비주간논평, 2025. 03. 11.
성주원, ""대형 산불, 끝이 아니다" 최재천 교수 '반복 재앙' 경고", 이데일리, 2025-03-26
주영재, "산불 멀지만 바람 세게 불면 몰라… 울진 원전도 ‘긴장’", 경향신문, 2025.03.27
김동현, "의성 산불, 불법 소각이 낳은 재난… 습관화된 소각행위가 위험을 부른다", 경북일보, 2025.03.27
이오성, "산업쓰레기 처리 불평등, 입증한 데이터 나왔다", 시사인, 2025.03.28
김선경, ""산불감시원 퇴근 시간 다 알아"… 대형산불에도 불법 소각 여전", 연합뉴스, 2025-03-29
불길을 따라가기
정이어린 (25. 03. 31.)
많은 기사들이 산불의 주요 원인으로 농민들의 봄철 관행소각을 지적하고 있다. 한 기사는 "고령의 어르신들은 누가 말려도 금세 또 불을 피운다."라면서 처벌 강화를 주장한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도 인터뷰에서 이를 '잘못된 생각'이라고 경고했다. 지역 현장의 소방관 분들은 충분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기자들과 정책입안자, 학자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면 모든 책임을 농촌의 고령 노인들에게 전가하는 일이 된다. 도시에서 발생한 산업폐기물의 대부분을 농촌에서 외주화 하며 국가가 책임져 온 것과 달리 농촌에서 발생한 폐기물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쯤으로 취급해 온 사실은 금세 사라지고 없다.
밭과 논에 불을 놓는 일이 수천 년 전부터 이뤄졌음에도 왜 이제 와서 이렇게 큰 산불을 만들어내는지 그들 중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들불'은 오히려 농경 공동체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섬세하게 사용되었고, 산불의 연료가 쌓이는 것을 방지하고 토양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 국내 산불 원인의 30%가량이 영농폐기물을 태우고 논밭에 불을 놓으면서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농촌에서의 방화가 초대형 산불로까지 번지는 이유는 사회가 산을 대해온 방식을 빼놓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산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관리되어 온 산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산의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거나 화전 경작을 함으로써 숲의 밀도가 낮게 유지되었지만(지배계층의 억압으로 늘어난 조선 후기의 화전민과 그로 인해 황폐화된 산림을 낭만화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산업화 과정에서 숲을 가꾸며 살아온 많은 농민들이 사라지고, 그동안 쉽게 드나들지 않았던 깊은 산까지 인간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떠나고 난 뒤 숲은 산림청 산하의 국유림이 되거나 매매의 대상인 사유림이 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의 인클로저는 농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숲 속에서도 진행된 것이다.
오늘날 산림청은 매년 2000억 원가량의 예산을 투입하여 '숲 가꾸기', '임도 확장' 등의 사업을 진행하는데, 이는 침엽수의 확대와 침엽수림에서 자라는 송이나 잣, 목재 등의 임업 생산물을 최대화하면서 숲을 이윤 추구에 복무하도록 하는 플랜테이션 사업이다. 사유림의 산주들 또한 경제적 동기로 인해 침엽수림을 그 과정에서 산은 산사태와 산불에 취약해진다. 결국 그로 인하여 재난에 노출되는 건 산 주변에서 살아가는 농촌, 산촌 지역의 거주자들이다. 홍석환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그러한 산림청의 여러 비리와 부패를 꼬집으며 산림 경영 정책에 대해 비판해 왔다. 그렇다면 침엽수가 아니라 활엽수를 더 많이 심는 등 산림 관리 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인 것은 아닐까?
강원일보의 신하림 기자가 쓴 산불 관련 기획 기사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22년 동해안 산불 피해 이후 대부분의 산주들은 조림 희망 수종으로 임업 생산이 용이한 침엽수를 다시 선택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산불의 원인이 침엽수 중심의 조림 정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는 침엽수림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이 있다는 걸 때문이다. 실제로 신하림 기자가 쓴 <산불은 마을을 어떻게 바꿨나>에도 산불로 침엽수림을 잃은 이후 송이 채취가 어려워져 수입이 불안정해졌다는 한 주민의 이야기가 나온다. 산림 관리 정책은 누군가의 생존권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 수도권 중심, 도시 중심의 경제구조가 비수도권 지역의 주민들로 하여금 산불이라는 재난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산불의 원인과 결과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책임 전가는 오히려 문제 그 자체인 기존 체제를 재생산한다. 예를 들어, 소방 장비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조엘 자스크(숲이 불탈 때, 2025)가 말한 '불 산업 복합체'의 이윤으로 귀결될 수 있다. 벌써 수천억 원 대의 헬기와 드론 등의 진화 장비를 구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다. 이재 산림청은 임도를 이번 산불을 적절한 통제의 실패로 바라보고 보다 완벽한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자연을 보존 또는 자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관리주의적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저 산불의 원인은 어느 부주의한 농민의 실수만도, 단지 잘못된 산림관리 정책 때문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초대형 산불이라는 끔찍한 재난의 불씨를 가진 숲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노동과 산업과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상호 의존관계에 있을 것이다. 다른 방식의 관계, 삶을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려는 상상과 실천만이 이 불길을 다르게 흐를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 추상적이고 모호할 수 있음을 알지만, 나는 언제나 이런 복잡한 재난 속에서는 쉬운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항상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산불 현장에 가본 적 없고, 산불이 무엇인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뉴스와 신문기사를 통해 활활 타올라 재가 된 숲의 잔해와 이재민들의 선별된 고통을 듣고 볼 수 있었던 도시인일 뿐이다. 도시에 산다는 건 숲과 산을 한 몸처럼 여기기보다는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늘 낭만화의 위험을 수반하며, 생태주의적인 시선도 그러한 위험을 피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내가, 그리고 우리가 낮은 곳에서부터 덮쳐오는 재앙 속에서부터 길어진 말하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더 나은 질문은 무엇일까 고민할 뿐이다. 산불이 지나간 후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산불은 누구에게 더 가혹한지, 산불 피해로 일상을 잃은 이재민들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정부의 이재민 대책은 또 다른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저 물음을 포기하지 않을 뿐이다. 곧 시간을 내 동료들과 함께 산불이 일어난 곳에 가봐야겠다.
쓰면서 읽은 것들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2017)
신하림, 산불은 마을을 어떻게 바꿨나(2024)
조엘 자스크, 숲이 불탈 때(2025)
정은정, "산불과 농촌쓰레기 실화", 경향신문, 2023-03-17
장수지, "영농폐기물, 사각지대 속 처리 곤란 여전", 한국농정신문, 2023.04.02
장윤우, "숲 가꾸기가 우리 숲에 도움 된다?", 노컷뉴스, 2024-07-25
강은선, "산 사들이는 개인 매년 증가… 매입 규모 클수록 이 지역에 몰리다", 세계일보, 2024-08-03
이송희일, "불타는 LA를 보라", 참세상, 2025.01.24
신하림, "불쏘시개 역할 ‘침엽수’들은 왜 ‘활엽수’으로 바뀌지 못할까", 강원일보, 2023-03-09
홍석환, "산불 키우는 산림청, 숲에서 답을 보라", 창비주간논평, 2025. 03. 11.
성주원, ""대형 산불, 끝이 아니다" 최재천 교수 '반복 재앙' 경고", 이데일리, 2025-03-26
주영재, "산불 멀지만 바람 세게 불면 몰라… 울진 원전도 ‘긴장’", 경향신문, 2025.03.27
김동현, "의성 산불, 불법 소각이 낳은 재난… 습관화된 소각행위가 위험을 부른다", 경북일보, 2025.03.27
이오성, "산업쓰레기 처리 불평등, 입증한 데이터 나왔다", 시사인, 2025.03.28
김선경, ""산불감시원 퇴근 시간 다 알아"… 대형산불에도 불법 소각 여전", 연합뉴스, 2025-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