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내 성폭력 사건 피해자 발화

20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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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청년기후긴급행동 대표 강은빈입니다.


가까이서 또 멀리서 청년기후긴급행동을 지켜봐 주시고

함께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애정을 담아 안부 인사를 드립니다.


5월이 한창인데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느 여름처럼 뜨거운 태양볕이 내리쬐다가도,

우중충한 먹구름 아래 밤새 빗방울이 쏟아지다가도,

선선한 봄바람이 나뭇잎들과 우리의 코 끝을 간질이기도 합니다.


환절기. 한 철이 바뀌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새 시절을 맞이하기 위해

이토록 혼란스러운 날씨를 겪고 있는 걸까요?


재판 대응과 현장 연대, 세미나, 회의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와중에

단체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늘 그렇듯 세상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슬프고 화나는 일들은 이미 넘쳐나니까요.



2023년 2월, 처음으로 일주일 휴가를 보냈습니다.

저는 한베평화재단의 베트남 평화기행에 다녀왔습니다.

그 곳에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및 유가족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환대해 주셨고, 직접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한국인들을 이리 반갑게 맞아주실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동안 한국 시민들은 베트남전쟁 피해 생존자 분들께 용서를 구하고,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기억의 투쟁을 묵묵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해졌기에

그런 환대가 가능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피해자가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해자가 진실을 마주하고자 할 때,

그 위태로운 영혼을 살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023년 1월 19일,

오지혁 전 대표는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준강제추행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 막연하게 느껴왔던 불쾌함의 정체를 깨달았습니다.


다음 날 오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글귀가 적힌 사진을 한 장 보냈습니다.

‘밖에서 알을 깨면 죽지만, 스스로 깨고 나오면 삶이 시작된다.

모든 위대한 것들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저는 우리가 조직 내 동일한 위치에서

함께 사건을 직면할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했습니다.


스스로 가해자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돌보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요.

저는 운영위원회에 피해 사실을 알렸고, 가해자와의 분리를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청년기후긴급행동에 성폭력 사건 대책위원회가 꾸려졌습니다.



2021년 7월 공동대표를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불쾌한 언행들이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개입과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주변에 타인의 험담을 하거나 불화를 나누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습니다.

이는 학창시절 학교 폭력과 따돌림 문화를 주도해 본 경험이

저에게는 큰 죄책감이자 가해의식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좁디 좁은 비영리-사회운동 영역에서

한 사람의 평판이 얼마나 빠르고 쉽게 퍼지는지 알기 때문에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라는 생각으로 침묵했습니다.

대표단 내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고,

원만한 관계를 지향하며 최대한 일에 집중했습니다.


아마 저는 혼자였다면, 성폭력 사건을 온전히 직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저에게는 그럴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사건을 마주하는 동안

멤버들은 형사상 범죄에 해당하는 준강제추행 행위 뿐만 아니라

그 기저에 있던 잠재적인 폭력성을 포착해 주었고,

제가 스스로를 잘 보살필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습니다.

아래는 대책위원회와 피해자 면담을 가지면서 깨닫게 된 것들입니다.


1. 나는 이 피해를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

‘용인할 수 있는 일’로 여길 필요가 없다.

당해도 마땅한 피해는 없다.

이는 많은 책임을 부여받은 대표더라도,

과거 가해자였던 사람이라도 예외일 수 없다.


2. 나에게 이러한 피해가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집착적인 공격성이 드러나는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관계와 공간에 스스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3. 나는 내가 스스로 용인해 온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를

나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말해도 된다.

이는 타인(가해자)을 위협하는 행위가 아니다.


4. 가해자는 본인의 행위로 침해하려 한 존엄에 대해 사죄해야 하고,

그것이 피해자에게 어떤 위해였는지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가해자 혼자서는 이를 깨닫고 직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관계적인 개입과 소통이 필요하다.


5. 나에게 이러한 피해가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힘이 없거나 약하다.

따라서 관계적인 개입과 소통이 필요하다.


6. 내가 생명답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서로를 생명력 있는 존재로서 바라봐주고

함께하는 사회적인 관계망이 필요하다.



2023년 4월 22일,

청년기후긴급행동은 지구해방의 날을 선언했습니다.

여의도 공원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내 몸은 지구 공동체의 일부다,

여성해방 없이는 지구해방도 없다, 읊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해방 사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취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일상적 위계와 폭력을 방치하지 않도록

함께 세상을 보살피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우리 사회를 억압하는 권력에 저항하며

맞서 싸울 수 있다면 더욱 더 좋겠습니다.


대표단의 업무 중 저의 독립적인 영역이 두산중공업과의 재판이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저에게 법정은 치열한 투쟁 현장이자 피난처였습니다.

1년 이상의 기간동안 이어진 두산과의 민사 소송에서 결국 이겼듯,

청년기후긴급행동이 성폭력 사건 이후의 회복에도 성공할 수 있도록

연대의 마음과 지혜를 모아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여성이 해방되면, 장담컨대 여성들은

다른 존재들의 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노동할 것입니다.


여성해방 없이는 지구해방도 없습니다.



2023. 5. 9.


청년기후긴급행동

강은빈 드림